왓챠피디아란?
영화 좀 본다 하는 사람들은 다 알 앱인 왓챠(watcha), 넷플릭스와 비슷한 VOD 플랫폼인 '왓챠 플레이' 말고 그전부터 있었던 영화 별점을 주는 앱이다. 사실 그냥 별점만 주는 앱이었으면 이렇게 유명해졌을 리 없겠고 내가 준 영화 별점을 기반으로 내가 보지 않은 영화에 "예상 별점"을 주고, 영화를 추천해준다는 게 이 서비스의 백미였다.
당연히 많이 평가할수록 예상점수와 추천이 정확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. 이들에게 내 영화 평가를 제공하는 것은 단순히 내 기록용으로 적어두는 게 아니라 새로운 영화 추천(나와 남 모두를 위한) DB가 된다는 점에서 기존의 영화 별점을 기록해주는 것과는 근본적인 목적의 차이가 있다.
그렇게 왓챠에 약 천개의 별점을 매긴 후로 내게는 습관이 생겼다. '뭘' 볼까 고민할 때, 뭘 '볼까 말까' 고민할 때 왓챠에 굉장히 의존하게 된 것이다. 포스터 보고 혹은 광고를 보고 재밌어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왓챠 예상별점이 낮으면(3점 이하) 결국 그 영화를 안 본 경우가 많았다. 그리고 대체로 왓챠의 예상 별점이 높은 영화를 보면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.
그래. 훌륭한 알고리즘 덕분인지 왓챠의 내 취향 저격률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.
왓챠 의존도 상승의 이유
대체 왜 이렇게 왓챠에 의존하게 되었을까.
나에게 효율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.
내게는 돈도, 시간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내 작고 소중한 여가시간에 즐기는 영화가 노잼이면 안되기 때문이다. '어? 이 영화 재미없네, 에이 시간 버렸다. 다른 거 재밌는 거 뭐 있나~'가 되는 게 아니라 '내 황금같은 토요일 저녁!!! 아!!! 젠장!!!! 광고에 낚였어!!!!!!' 이렇게 되기 때문이다. 실패의 대가가 너무 크므로, 도전을 할 수가 없다. 하고 싶지 않다.
왓챠에 의존해서 내가 잃은 것
이렇게 얻은 안정적인 내 취향의 영화 목록과 적당히 만족할 수 있는 여가시간에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.
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괜찮은 장르.
예전이었으면 싫어했을텐데 그 날의 내 기분 때문에 괜찮은 영화.
들어본 적 없는 감독인데 반해버려서 이전 작품을 검색해보게 되는 그런 기분.
내 취향을 저격해주는 것이 아니라, 내 취향을 넓혀주는 그런 영화.
적당히 재밌는 영화를 보는 것 보다
어쩌면 훨씬 더 근본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기회.
나는 이런 것을 잃고 있었다.
내가 치른 대가는 생각보다 컸던 게 아닐까.
나는 취향의 발견을 잃었다.
왓챠는 내 취향을 정확히 저격했고 그러면서 동시에 내 취향의 성장점 역시도 관통했던 것이다.
슬픈 일이었다. 우울해서 한동안 왓챠 앱을 안 썼다. 대신 그래서 영화도 별로 안 봤었다. 여전히 내 여가를 함부로 쓰는 것은 내게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고 2~3시간짜리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이것이 재밌을 것이라는 확신이 사라지니 발걸음 떼기가 훨씬 어려워졌다.
기술을 잘 활용하는 방법
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하다가, 10번에 한번 꼴 정도는 명작이라고 칭해지는 영화를, 혹은 내 예상 별점은 낮지만 내가 사랑하는 평론가가 추천 또는 언급한 영화를, 나와는 취향이 다른 친구가 추천해주는 영화를, 또는 그냥 왠지 모르게 내가 혹한 영화를 보는 것으로 다짐했다. 나는 왜 이 영화가 재미없는가를 고민하는 시간도 내가 원하는 성장의 방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.
그 과정에서 내 취향이 더 단단해지면서, 동시에 그 범위가 커지기를 바란다. 취향이 저격당하지 않고, 취향이 확장되었으면 좋겠다. 왓챠가 내 취향의 성장을 멈추게 하는 대신 적절한 자극으로 성장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는 것은 역시나, 내 몫이다. 늘 그랬듯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, 기술을 적절히 활용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.
내가 몰랐던 것들의 매력을 더 많이 알게 되기를, 더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취향의 확장에 드는 비용을 너무 겁내지 않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.